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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해협 우주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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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도의 검 (1966~1975) === 1966년 사비에트는 로켓포병과 방공군에 흩어져 있던 우주 관련 부대를 통합해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을 독립 군종으로 창설했다. 궤도방위군이 처음으로 맡은 핵심 전력은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가 추진한 「메치(Меч)」였다. 메치는 핵탄두를 저궤도에 올려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돈 뒤 목표 상공에서 역추진해 떨어뜨리는 부분궤도 폭격체계였다. 루이나의 조기경보 레이더는 모두 사비에트가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메치는 지구를 돌아 북쪽에서 접근할 수 있었고, 고도 150km 안팎의 낮은 궤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레이더에 포착되는 시간도 짧았다. 1968년 9월 첫 부대가 실전 배치되었고, 1971년까지 사르다에 18기의 발사대가 갖춰졌다. 이는 부분궤도 폭격체계가 실전 배치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사비에트는 메치가 궤도를 한 바퀴 다 돌지 않으므로 '궤도에 배치된 무기'가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사비에트는 애초에 우주조약 당사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논리는 법적 방어라기보다는 국제 여론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루이나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가입하지 않은 조약의 허점까지 챙겼다"는 냉소가 나왔다. 루이나의 대응은 두 갈래였다. 첫째는 공군의 적외선 조기경보위성 「WATCHFIRE」였다. 1970년 11월 첫 위성이 정지궤도에 올랐고, 1975년까지 4기 체제가 갖춰졌다. WATCHFIRE는 미사일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든 발사 순간의 화염을 궤도에서 탐지했기 때문에, 메치가 노린 방향의 이점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메치가 WATCHFIRE를 낳았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둘째는 루이나도 궤도 핵무기를 가질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국방부는 1969년 4월부터 1971년 8월까지 궤도 대기 핵탄두 연구 「HIGH TIDE」를 진행했으나 최종적으로 배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정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궤도 핵탄두는 궤도 특성상 루이나 자신의 영토 위도 매일 지나가므로 고장이나 사고가 곧 자국 영토 위의 핵 사고가 될 수 있었고, 비용이 같은 수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2.6배로 추산되었으며, 무엇보다 해군이 잠수함 전력의 생존성이 궤도 무기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이 결정으로 루이나의 전략 억지력은 바다에 두고, 궤도는 그것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쓴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 지원의 핵심은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였다.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은 발사 지점의 위치가 정확해야 명중률이 보장되는데, 1964년 실용화된 LODESTAR는 잠수함이 수면 가까이에서 위성 신호를 받아 자기 위치를 산출할 수 있게 했다. 초기 오차는 약 200m였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25m까지 줄었다. LODESTAR는 이후 루이나 민간 항법의 뿌리가 되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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